라디오 이야기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

알씨보이 2016. 2. 7. 22:27

원문은 사라지고 번역글만 남았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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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했던 천재, FM방식을 발명한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Edwin Howard Armstrong) 머리에 떠오른 생각

이 글을 본지 한 9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아직 홈페이지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본 김에 많이 날림이겠지만(무선통신 기술 분야를 아는 것도 아니니 용어도 잘 모른다) 한 번 번역해 보았다.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원문주소는 http://world.std.com/~jlr/doom/armstrng.htm.



『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

 

1890년 뉴욕 生, 1954년 뉴욕에서 사망

 

암스트롱은 이 명단(불운한 과학기술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술자 중 하나이다. 위대한 기술자는 보통 하나, 또는 두 개의 중요한 기술혁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위들러는 op amp(연산증폭기), 크레이는 수퍼컴퓨터, 서덜랜드는 sketchpad와 비행시뮬레이션 장비였다. 암스트롱은 세 가지 기술, 재생법과 수퍼헤테로다인, 주파수 변조방식(FM)을 발명했다. 그는 미국의 마지막 발명가 영웅이며 지극히 미국적인 최후(변호사에 의한 법적 살해)를 맞았다. 또한 그가 마지막에 벌인 법적 투쟁은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은, 왜 AM라디오가 FM에 밀려 사라지지 않았는지와 같은 의문을 낳았다.

 


1940년대 말의 이 모습을 보면 냉혹한 금융인 같지만 결국 그를 죽게 한 격렬하고 양보하지 않는 성품을 보여준다.

 

참고문헌은 1956년 로렌스 레싱이 지은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  맨 오브 하이 피델리티(하이파이, 고충실도) 이다. 레싱은 암스트롱의 친구였고 그의 자살에서 개인의 업적을 무시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보았다. 논쟁거리가 되었던 책이지만 몰입이 잘된다.

 

암스트롱은 1890년 맨하튼의 개신교를 믿는 대가족(현재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지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활기 넘치고 친절했지만 눈에 드러나는 창의성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린 시절에 다른 수백만의 중산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9살 때 걸린 성 비투스 무도병(류머티스 열병) 뿐 이었다. 이 때문에 2년간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평생 동안 어깨와 턱에 경련이 남게 되었다. 학교공부는 금방 따라잡았지만 언제나 진지한 아이였다. 마르코니의 업적에 열광했고 얼마 안되어 무선통신에 관해 알려진 모든 것을 배웠다.

 

암스트롱은 콜럼비아 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1913년, 아직 재학생일 때 첫 번째 위업인 재생법 발견했다. 이 때는 리 드 포레스트가 개발한 최초의 삼극진공관, 오디온 진공관이 나온 지 몇 년이 되었지만 누구도 이걸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너무나 조잡한 증폭기(앰프)였기에 드 포레스트 자신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은 삼극 증폭기의 입력에 대한 출력 비율이 양의 피드백으로 증폭기 출력의 일부를 다시 입력하면 매우 크게 증가함을 발견했다. 충분한 피드백이 주어지면 증폭기는 무선 송신기에 적합한 안정적이고 강력한 발진기가 되었다. 약간 약한 피드백을 준다면 증폭기는 당대의 그 어떤 다른 제품보다 더 민감한 무선수신기가 된다. 다른 학자들도 같은 시기에 피드백 현상을 경험했지만 이를 특징짓고 이해하여 실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은 암스트롱이었다.

 

드 포레스트는 암스트롱의 성과를 듣고, 즉시 자신의 연구방향을 재생법으로 바꾸었다. 재빨리 관련기술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고 그 다음, 1920년부터 암스트롱의 특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토록 젊은 사람이 자기가 개발한 진공관을 자신보다 더 잘 이용했다는 점에 격노했다. 드 포레스트는 이 기술에 대한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 했는데 회사를 25번 창립했지만 파산했고 세 번 결혼하고 이혼한 터였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한 기술은 오디온 진공관뿐이었기에 어떻게든 권리를 취득하려 했다. 무선기(라디오)의 핵심회로를 장악해 큰 이익을 보려 한 AT&T가 뒤를 봐주었다.

 

특허분쟁은 14년을 끌었고 소송비용은 100만달러를 넘은데다 대법원에 올라가기도 여러 번 이었다. 드 포레스트의 증거는 특정 회로가 일정 주파수에서 웅 거리는 소리가 냈다는 1912년 실험기록뿐이었다. 웅 하는 소리는 피드백으로 회로에서 발진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지만 당시 포레스트는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고 관련연구를 진행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AT&T 측 변호사는 기술에 무지한 필라델피아 판사들에게서 유리한 판결을 받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 판결로 이미 다 끝난 재판이라 주장하여 다른 항소에서 이길 수 있었다. 대법원은 너무나 애매한 소송이라 항소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에 드 포레스트는 거기서도 승소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암스트롱의 특허를 파기했다. AT&T 홍보담당자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오늘날 우리는 드 포레스트가 재생법을 발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암스트롱에겐 다른 아이디어가 많았다. 1차대전 때 육군에서 연구하는 도중 수신감도와 튜닝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정교하고 훌륭한 수퍼헤테로다인 기술을 발명했다. 무선기에서 쓰는 고주파에 맞는 증폭기를 만들기는 상당히 어려웠고 한 주파수 대역에서 좁은 대역의 주파수를 선택할 수 있는 튜닝필터를 만드는 것도 그러했다. 필터를 한 주파수에 맞추면 다른 주파수는 모두 차단해야 하고 그런 다음 다른 주파수로 변경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주파수를 바꿀 수 있는 발진기를 만드는 건 쉬웠다. 발진기 신호가 수신신호에 더해지만 두 신호와 다른 주파수를 가진 진동신호가 발생한다. 고정 필터를 만들어 좁은 대역에서 이 진동 주파수를 선택할 수 있고 이를 저주파 증폭기로 보낸다. 발진 주파수가 변함에 따라 다른 무선 주파수들이 진동 주파수로 떨어져 내려와 선택된다. 다르게 말하면, 


가변 발진기와 좁은 주파수 필터가 있으면 가변의 좁은 주파수 필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기술은 현재 사실상 모든 무선기에 쓰이고 있다.



1923년 암스트롱이 아내 메리언과 신혼여행 중인 모습이다. 마리온은 RCA회장의 비서였다. 암스트롱은 최초의 수퍼헤테로다인 라디오 중 하나(최초의 휴대용 라디오 이기도 했다)를 들고왔는데 첫번째 해변 오디오였던 셈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수퍼헤테로다인 기술 권리에 수십만 달러를 지불했다. 암스트롱은 또한 이와 비슷할 정도로 혁신적인 수퍼 재생 수신기로 RCA와 계약을 맺었다. 이 수신기는 증폭기를 거의 발진 직전상태까지 만들어 진폭 이득을 없애 잡음을 방지한다. 20kHz가 넘으면 귀가 진폭이득의 편차를 알아차릴 수가 없고, 한 진공관에서 더 많은 진폭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 기술은 그의 다른 혁신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덕분에 많은 RCA 주식을 얻었으며 다른 발명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암스트롱은 평생동안 누군가의 직원이 된 적이 없다.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지만 연봉은 1달러였다. 대학에서 줄 수 있는 것보다 특허로 버는 돈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생을 가르친 적은 없지만 학생들은 그가 교수인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그 덕에 많은 지식인들과 연구자원을 접하게 되었다. 암스트롱은 학교건물 지하에 연구실을 열었다. 그는 회사를 세운 적이 없으며 조수 몇 명만 데리고 모든 연구를 했다. 조수 중 일부는 따로 자신만의 중요한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

 

드 포레스트와 벌인 특허분쟁은 너무나 힘들고 굴욕적이었다. 재판에서 지고 홍보가들이 그를 사기꾼 발명가라고 말하자 암스트롱은 뭔가 보여주고자 했다. 이 때가 1930년대 초였고 암스트롱은 40대 초반이었을 때다. 보통 기술자라면 창의성에서 전성기가 지났을 때지만 암스트롱은 그의 가장 위대한 혁신인 주파수 변조방식(FM)을 발명해냈다.

 

재래식 진폭변조방식(AM)에서는 무선신호의 세기가 발신되는 음성신호의 세기에 비례한다. 문제는 자연계는 비슷한 변조신호로 가득 차 있고 이는 잡음으로 나타난다. FM방식에선 주 신호의 진폭이 아닌 주파수가 변동한다. FM신호처럼 변동하는 자연전파는 거의 없기에 간섭이 훨씬 덜 하다.  

 

FM방식은 20년대에 개발 시도가 있었지만 포기되었다. 주어진 주파수 대역에 더 많은 신호를 반송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했었다. 상세한 수학분석 결과 대역 좁은 FM신호는 같은 세기의 AM신호보다 언제나 음질이 더 나쁘다고 나왔다.

 

암스트롱은 FM신호 대역이 꼭 좁을 필요는 없다고 통찰했다. FM신호는 AM신호의 5배나 되는 넓은 대역에서도 변동할 수 있었고 신호대비 잡음비율도 훨씬 좋았다. FM방식에 대한 수학계산은 정확했으나 의미가 한정되어 있었다. 실험과 물리적 추론에 의지하여 암스트롱은 방정식을 넘어섰다.

 

그는 1933년에 처음 FM 연구성과를 그의 기술에 대한 라이센스 대부분을 취득한 RCA에 공개했으나 이상하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RCA는 AM방식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그들의 송신기 전부와 수백만 대의 라디오가 팔려 사용 중이었고 아직 투자비용을 뽑기 전이었다. 라디오는 일상생활용품이 되었고 품질이 아닌 가격으로 팔리는 물건이었다. RCA는 소비자는 라디오에서 음악이 어떻게 들리는지는 관심 없고 그냥 싸게만 구하고 싶어한다고 자체결론을 내렸다. 몇 년간 기술평가를 한 뒤 라이센스취득을 거절했다.

 

암스트롱은 알겠다고 했다. 규모가 작은 회사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었다. 송신기와 안테나, 수신기를 포함한 전 시스템을 설계하고 1939년엔 뉴욕과 뉴잉글랜드에서 시법방송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음질에)넋을 잃을 정도로 좋아했다. 당시로썬 축음기 보다 훨씬 좋은 최고 수준의 음질이었고 독일이 테이프를 완성하기 까지 그러했다.

 

RCA는 즉각 연방 통신 위원회(FCC)에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TV에 FM용 주파수(50MHz 전후)를 할당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 공격의 의도는 너무나도 뻔했기에 뉴딜주의자였던 통신위원장 플라이는 대신 44MHz 부터 50MHz까지의 주파수대역을 FM에 할당해주었다. 원래 이 대역은 TV 제 1채널이 될 예정이었는데 오늘날까지 TV다이얼에서 빠져있다. 그는 또 TV소리는 FM방식으로 전송되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RCA는 이길 수 없게되자 같은 편에 서려고 했다. 암스트롱에게 특허료로 1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로열티는 어렵다고 했다. 암스트롱은 이를 거부했다. 다른 모든 라이센스社는 로열티를 지급했었고 이런 계약은 그에게 적대하지 않고 같이 일해준 회사들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분쟁이 가열되기 전에 더 큰 분쟁,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 중엔 누구나 FM을 사용했다. 암스트롱이 전쟁기간 동안 군대가 그의 특허기술을 로열티없이 쓸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어떤 회사도 만들지 못하고, 그 또한 실험실 경비로는 만들기 어렵다는 제스처였다. 휴대용 FM 통신기술은 유럽과 태평양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암스트롱 자신은 연속파 레이더를 연구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배치되지는 못했다.

 

RCA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45년 RCA와 다른 일군의 라디오 회사는 FM 대역을 44-50MHz에서 오늘날과 같은 88-108MHz로 옮겨야 한다고 연방 통신 위원회를 설득했다. 명목상 이유는 전리층 교란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누구도 이를 확신하지 못했다. 50MHz 바로 위의 TV채널(FM 소리 채널도 딸렸음)은 별 문제를 겪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결정으로 벌어진 건 그 때까지 만들어진 모든 FM 송신기와 수신기가 일시에 쓸모없게 된 거였다. 설상가상으로 연방 통신 위원회는 중앙방송국에서 산정상 안테나 사이의 라디오 중계소를 불허하여 FM 방송범위를 크게 제한했다. 대신 FM 방송국은 방송내용을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AT&T社의 동축케이블을 통해 송출해야 했다.

 

모든 것이 의도한대로 FM 방송을 마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음모로 인해 AM방식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음질을 고려해야 하는 어떠한 프로그램도 AM방식을 쓰지 않는다. AM방식은 이미 60여년 전에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타성과 규제 때문에 지금껏 사용되는 것이다.

 

이 싸움에 진 이후 암스트롱은 울분을 삼키며 모든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다. 1948년에 높은 주파수에서 작동하도록 만들었지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술적 성과가 되었다. RCA는 암스트롱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그의 특허를 이용하여 8년전부터 FM 수신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특허기간은 겨우 2년밖에 남지 않았다. RCA가 특허료를 지불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는 1949년에 특허침해 소송을 걸었다. 암스트롱 스스로가 제 1증인으로 나섰다. RCA측 변호사는 재판기간 내내 사소한 걸로 트집잡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져댔다. 2년 후, RCA는 30년대의 산더미처럼 많은 FM관련 연구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의 절정은 데이빗 사노프가 직접 RCA는 암스트롱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FM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후, 암스트롱은 아무 합의제의를 받지 못했다.

 

1953년, 암스트롱의 라이센스 계약과 특허가 둘 다 만료되었다. 어마어마한 소송비용과 연구비용으로 암스트롱은 거의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추수감사절에 아내와 크게 싸운 이후 아내는 그를 떠나 코네티컷에 사는 누이한테 가고 말았다.

 

1954년 1월 31일, 암스트롱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2쪽을 써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버코트와 신사모, 스카프, 장갑으로 정장을 한 다음 아파트 13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몸은 3층 돌출부에 떨어졌기에 그 다음날 아침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내인 메리언은 소송을 계속했다. 암스트롱과는 달리 매리언은 타협에 적극적 이었다. 백만달러에 RCA와 합의를 보았고 실배니아와 CBS와 같은 암스트롱의 특허를 침해한 다른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계속해 나갔다. 매리언은 재판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수백만 달러를 받았다. 모토롤라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1967년 대법원에서 재판에 졌다. 암스트롱이 죽은 지 13년이 되는 해였다.

 

암스트롱 전기를 쓴 레싱에 따르면 진정한 혁신은 언제나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이루는 것이다. 무선기는 겨우 9명이 이룩한 7개의 혁신으로 발명되었다. 플라스틱은 과학자 5명(독일인이 4명, 미국인이 하나)이 독립적으로 거둔 성과에 기반했고 월러스 캐로더스만 회사(듀폰社)와 함께 중요한 발명을 해냈다(알만한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 발명품은 나일론이다. 역자주) (이상하게도 그 또한 자살했다.) 원자력은 작은 유럽난민 과학자 집단의 성과이다. 혁신은 머릿 속에서 번쩍 떠오르는 것이지 위원회 회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낸 광고를 보면 한 나라의 진정한 혁신자는 기업이라고 한다. 기술혁신을 하지도 않은 기업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RCA와 A&T가 암스트롱 깎아내린 것과 같은 기업주의자 행태는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RCA는 이미 오래 전에 제네럴 일렉트릭(GE)에 합병되었고 AT&T도 예전 같지 않지만 홍보꾼들은 과거와 다를 바가 없다. 오직 조직만 생산하며 개인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거의 모든 기술자가 그렇게 산다. 수많은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프로젝트든 많은 사람이 성공에 공헌한다. 그 사람들이 한 사람에 비해 경시 되야 하는 걸까? 아니다. 그렇지만 개인보다 팀을 강조하는 것은 기술자보다 조직을 강조하게 되는 폐해가 따른다. 기업은 왕이고 사람은 언제든 바꿔 끼울 수 있는 부품이 되고 만다.

 

암스트롱은 사업가가 아니었지만 무선통신에 RCA보다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양차대전에도 조국을 위해 일했다. 그의 사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한 나라의 진정한 혁신은 기업이 아닌 시민이 이루는 것이다. 』


20세기 초의 무선통신 기술이란 현재의 IT기술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더 의미가 클지도 모르겠는데 무선통신 기술의 기초가 되는 물리이론을 정립한 과학자들은 무선통신 자체가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나왔을 때의 놀라움도 어쩌면 더 크지 않았을까? 하지만 암스트롱은 현대에도 쓰이는 중요기술을 개발하고도 합당한 댓가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실 좀 만 세상물정을 알았더라면 나중에 그의 아내 메리언이 그랬던 것처럼 대충 '쇼부'보고 편히 살았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기엔 너무 고집이 센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현대 한국에선 과학자와 기술자, 속칭 '공돌이'들이 제 댓가를 못받는 다는 말이 많다. 과학기술에 무지한 법조인 때문에 몇 년을 고통 속에서 보낸 과학자도 있었다. 암스트롱은 그런 사람들의 선배에 속하지 않을까? 이런 사례를 보면 미국이라고 처음부터 과학기술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사회였던 게 아니다. 우리도 노력하면 희망이 있다고 해야 할까나?  

P.S 1 : 암스트롱의 일화는 지식 e채널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P.S 2 : 당시 미국 전기업계에서 기술자를 가장 양심적으로 대한 대기업은 웨스팅하우스인 듯 하다. 하긴, 무명 천재 과학자(니콜라 테슬라)과 함께 온갖 음해와 악선전을 일삼던 지배적 기업(에디슨의 에디슨 전기회사. GE의 전신)을 이겨낸 뼈아픈 경험이 있으니...

P.S 3 : 농담이 아니라 미국이 요즘에도 저랬다면 구글같은 회사는 'Don't be evil'같은 소리하기도 전에 마소같은 회사한테 박살이 났을 것 같다.

P.S 4 : 결국 특허분쟁에서 승리한 암스트롱의 아내 메리언은 원래 암스트롱이 자살하게 된 원흉인 RCA 데이빗 사노프 사장의 비서였다. 

P.S 5 : 마소가 이룩한 혁신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아마 20세기 말인 것 같은데 그 때 마소가 한창 욕을 먹고 있었으니까 이상하지는 않다. 인터넷 브라우저 끼워팔기가 문제가 됐을 때였지 아마?



(eom)